LH의 기능 축소 움직임에 기대감 부푸는 디벨로퍼들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빈 자리는 민간 디벨로퍼들의 기회가 될까.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 의혹이 불거진 이후 LH 조직과 기능을 축소하는 방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시장 일각에선 민간의 개발 사업이 활발해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오고 있다.
5일 건설·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달 29일 ‘부동산 투기근절 및 재발방지대책’을 발표하면서 조직·기능 조정, 내부 통제 강화, 방만 경영 방지 등의 내용을 담은 LH 혁신 방안은 추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해체 및 토지공사와 주택공사 분리안 등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기능 축소로 가닥이 잡혔다.
지난 달 9일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가 압수수색을 진행한 경남 진주시 충무공동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 /김동환 기자
이번 사태로 시장에서는 LH, 즉 공공이 주도하는 공급 정책은 수정이 불가피다는 시각이 우세해지고 있다. 공공이 개인 소유 토지를 수용해 개발하는 공공 주도 방식에 대한 반발이 거센 가운데, 공직자 불법 투기 논란이 커지면서 주택 공급에 대한 신뢰도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주택 공급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라도 공급 방안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주택공급의 한 축인 민간 개발 사업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섞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민간 정비사업에 대한 인허가가 수월해지는것은 물론, 대규모 주거단지 개발에 민간 디벨로퍼(Developer·종합부동산개발사업자)의 기회도 커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증권가에서도 민간 디벨로퍼 역할이 커지는 성장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공공 주도→민·관 협력→민간 주도’로 개발 방식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면서 국내 민간 디벨로퍼의 역할이 커질 수 있다는 시각이다.
박세라 신영증권 애널리스트는 "LH가 주도하는 공급정책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서 "세계적으로 공급 패러다임이 대규모 택지 개발 방식에서 소규모 도시재생으로 변화하고 있는데다 주택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민간 중심의 도시재생 사업으로 다시 선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부동산 관련 개발 사업자를 의미하는 ‘디벨로퍼’는 설계나 건설 일부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기획, 용지확보, 개발, 설계, 건설, 운영, 관리 등 전반을 모두 수행한다. 대표적인 공공 디벨로퍼인 LH와 SH는 공공성 추구에 집중하는 반면, 민간 디벨로퍼는 수익 창출이 목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국내 주요 민간 디벨로퍼로는 MDM, 신영, 피데스개발, 네오벨류, 정우건설산업, HDC현대산업개발, DL(옛 대림산업) , 롯데자산개발, SK디앤디, KT에스테이트와 한국토지신탁, 한국자산신탁 등이 꼽힌다.
국내의 경우 민간 디벨로퍼의 대규모 주거단지 조성 사례가 많지는 않다. 대표 사례로는 부동산 디벨로퍼 신영이 기획·개발한 충북 청주 대농지구(4852가구)가 주로 꼽힌다. 신영은 2004년 아시아 최대규모 섬유공장(약 49만9757㎡)을 보유한 대농을 인수한 뒤 일대에 개발을 추진해왔다. 대농지구는 4800여가구에 달하는 초고층 주상복합 주거시설과 백화점·쇼핑몰·학교·은행·병원·테마공원 등으로 구성됐다. 문화·쇼핑·교육·자연·행정기능이 집약된 원스톱 라이프가 가능한 자족단지다.
최근 계획이 확정된 ‘광운대역세권 개발사업’도 민간디벨로퍼인 HDC현대산업개발이 진행하는 사업이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 8506일대 14만8166㎡ 부지를 상업업무·복합·공공용지 등 3개 용도로 나눠 개발한다. 상업업무용지엔 호텔과 업무‧판매시설 등을 갖춘 최고 49층 랜드마크 건물이 들어서고, 복합용지엔 2694가구 주상복합이 건설된다. 최고 49층 아파트(35~49층) 총 11개 동이 지어질 예정이다. 저층부엔 공유오피스와 상가 등이 연면적 약 65만5000㎡ 규모로 들어선다. 공공기여로 확보된 공공용지 1만1370㎡엔 주민편의시설과 320가구 공공주택이 조성된다.
코레일이 소유해온 이 사업지는 1980년대 지역경제 활성화를 견인했지만 시설 노후화와 분진‧소음 등으로 혐오 시설로 전락한 물류부지다. 연이은 민간사업자 공모 유찰로 오랜 시간 사업추진에 난항을 겪다, 2017년 HDC현대산업개발이 사업자로 선정됐다. 서울시는 오는 7월까지 기존의 부지용도 등을 변경하는 지구단위계획을 결정할 계획이다. 이르면 2022년 상반기 착공해 2025년 완공하는 게 목표다.
MDM은 2019년 서울 광진구 광장동 옛 한강관광호텔 부지를 1850억원에 매입해 고급 주거지로 개발해 공급할 계획을 세웠으나, 정부 규제에 막혀 분양 콘셉트와 시기를 저울질해왔다. 이후 1~2인 가구 수요 등을 위한 고급 소형주택을 짓기로 했다.
DL이앤씨(옛 대림산업)도 서울 광화문 'D타워', 서울 성수동 '아크로 포레스트' 등을 시작으로 디벨로퍼사업에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 회사는 2020년 15% 수준에 그쳤던 디벨로퍼 사업 수주 비중을 2023년까지 약 30%로 끌어 올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광운대역세권 개발사업 조감도. /서울시 제공
부동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주택 공급 속도 및 사업의 효율성 면에서 공공이 주도해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민간이 함께 주택공급·도시 개발의 한 축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도 및 규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의 토지 수용 방식의 근거가 되는 택지개발촉진법은 1980년 말 전두환 정부의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에서 만든 건데, 이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라면서 "현재 국가가 개인의 사유재산인 토지를 빼앗고 원주민을 내쫓는 식의 강한 수용권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현행 민간이 주도하면 환수금 및 세금 폭탄을 부과하고, 공공이 주도하면 사유지를 강제 수용하는 방식이 이론적으로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공공주도 개발 사업 참여 시 주는 인센티브 장치들(용도변경, 용적률 상향 등)을 민간에도 똑같이 부여하면 사업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2·4대책을 통해 공공주도 패스트트랙 제도를 마련해 추가 신규택지를 확보하고, 공공 주도 사업에 참여하면 ▲용도지역 변경·용적률 상향 등 규제 완화 ▲절차 간소화 ▲추가수익 등 개발이익 공유 등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다.
고준석 동국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공공이 개발 사업 전체를 참여·주도하기보다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민간 참여를 유도하는 등 기능과 역할을 분배해 진행하는 게 적합한 방향"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다만, 민관 협력이나 민간주도 방식에서도 이번 불법 투기 사태와 윤리성 및 관리 부실 등의 문제는 나타날 수 있는데다 민간 참여로 인해 비용이 더 늘어나는 측면도 있는 만큼 제도를 더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